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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공예

철학자 베르구송과 형이상학

by 뉴갓머니$ 2022. 4. 28.

철학자 베르구송과 형이상학의 탄생과 역사.

철학자 베르구송과 형이상학

베르구송 앙리 베르구송(Henri Bergson)은 1858년 10월 1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바르소비 미카엘 (Varsovie Michael)은 폴란드 인이었고, 모친 카타틴(Katharine)은 영국인이었다. 1859년은 다윈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 of Natural Selection)」의 출판과 존 듀이(John Dewey)의 탄생이 기록되는 해이기도 하다. 학계에서의 베르그송의 성장은 매우 빨랐다. 그는 22세에 앙제르 리세 (Angers Lycée)의 철학 교수가 되었으며, 1900년에는 꼴레쥬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근대 철학 분야의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비상한 명석함과 매혹적인 문체로 베르그송은 일련의 작품들을 저술했으며, 그 저작들은 널리 주목받았고, 다양한 토론을 자극했다. 여기에는「의식의 직접 소여에 관한 시론(Essai sur J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 「물질과 기억 (Matiereet Mémoire,1897)」, 「사유와 운동(La pensée et le mouvant, 1903)」,「창조적 진화(L'Evolution créatrice, 1907)」, 「도덕과 종교의 두 원한 Iowndeux Sources de la Morale et la Religion, 1932)」이 포함된다. 이 중 마지막 세 권은 특히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가장 명석한 사상들을 담고 있다. 이 저서들로 인해 그는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각국의 학자들이 그의 강의를 청강하기 위해 파리로 몰려들었다. 그는 파리에서 1941년에 82세를 일기로 죽을 때까지 생활했다.

분석 대 직관 베르구송의 철학의 신념.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는 신념이 있다. 그에 의하면, 첫 번째 방식은 “우리가 대상의 주변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두 번째 방식은 “우리가 대상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첫 번째 방식에 연원하는 지식은 우리가 대상을 관찰할 수 있는 장점에 의존하며, 따라서 지식의 양태는 관찰자마다 다르고, 이러한 점에서 상대적이다. 더욱이 관찰에 의해 획득된 지식은 기호(symbole)들로 표현되며, 여기서 사용되는 기호는 특수한 대상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모든 대상들도 언급할 수 있다. 그렇지만 두 번째 종류의 지식은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우리는 대상에 “들어감”으로써 특수한 관점의 한계 요소들을 극복하며, 실재(réalité)로서의 대상을 파악한다. 베르그송은 여러 실례를 들어 인식의 두 가지 양태를 설명한다.

첫 번째 예는 공간상의 물체의 운동이다.

그에 의하면, 이 대상의 관찰 결과는 관찰자가 그것을 관찰하는 시점 (point du vue) 움직이든지 고정되어 있든지 간에 따라 다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운동을 묘사하려 할 때 그것에 대한 나의 표현은 내가 그것과 관계하고 있는 관계 양상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움직이는 대상을 묘사하고 관찰하는 모든 경우에, 나는 그것의 외부에 위치해 있다. 대상의 운동을 묘사하면서 나는 단일 구간들로 분할된 선(線)을 상상하며, 축을 가진 그래프상의 일련의 점들, 다시 말해 물체가 운동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일련의 점들을 통해 이 선을 표현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공간의 불연속적 구간 단위들의 견지에서 운동을 도모하려는 이러한 시도와는 대조적으로, 참된 운동, 즉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이 존재하는바, 그 속에서는 어떠한 점들도 교차하지 않는다. 베르그송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 자신이 운동하는 대상의 내부에 (à l'interieur d'un objet)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단지 점과 거리의 단위 구간으로서 구성된 기호적 언어로 표현된 대상이 아닌 실재 있는 그대로의 움직이는 대상을 인식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대상 그 자체 내부에 있기 때문에, 내가 경험하는 것은 대상을 보는 나의 관점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원초적인 것을 얻기 위하여 모든 다른 번역(traduction)들을 거부했기 때문에 운동의 묘사에 사용되는 기호에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서 있는 곳, 즉 나의 정지된 위치로부터 운동을 파악하는 대신에 나는 대상이 있는 곳, 즉 내부로부터 그 대상의 운동을 파악해야 된다. 왜냐하면 운동은 대상 그 자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팔을 올릴 때, 그는 자신이 창출해 낸 운동에 대한 단순하고 단일한 지각을 가지게 되며, 그는 이 운동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있다. 어떤가 실로 놀랍지 않은가? 나는 이 당시의 철학적 수준을 생각해 볼 때 믿기지 않을 정도의 고찰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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