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구송이 말하는 지식을 소유하게 되는 방법과 화이트헤드의 연관성.
내부의 시각과 외부의 시각의 차이.
즉 “나의 입장에서 그것을 외부에서 관찰한다면 당신의 말은 한 점을 통과한다. 이어 또 다른 점을 통과하며, 이들 두 점 사이에는 여전히 무수한 다른 점들이 있을 것이다. 내부에서 볼 때 절대란 단순한 것이지만, 외부에서 바라보면, 즉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절대는 그것을 표현하는 기호에 비하여 언제까지 가도 잔돈으로 다 바꾸어 주지 못할 금괴(金塊)와 같다. 그것은 우리가 소설에서 한 인물을 택할 때와 같은 경우이다. 저자는 인물의 특징을 묘사하고 그에게 행동하게 하고 말을 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내부의 본질을 인지하는 것의 어려움.
“아무리 그렇게 한다 해도 내가 일순간 나 자신을 그 주인공 자신과 하나가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때에 내가 경험하게 될 단순하고 불가분적인 감정과 결코 같아질 수 없다."이 묘사된 특징이 내가 이 특별한 주인공을 아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러한 특징들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나 사물들과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될 때만 그 인물을 나에게 이해시켜 줄 수 있는” 기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호들은 나를 그 인물의 외부에 위치시키며, “그것들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그 인물에 관해서 그가 다른 인물들과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점과 그 인물에게 고유하게 속하지 않는 점이다." 외부에서 한 사람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을 자각하기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의 본질은 내부적이며, 따라서 기호들에 의해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記述)과 분석 (分析)에는 기호들의 사용이 불가피하며, 이들 기호는 “일정한 시야에서 바라본, 혹은 기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그 대상에 견주어 볼 때 항상 불완전”하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야에서 파리의 사진을 찍든가 혹은 파리를 영화 필름에 담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고 걸어 다니는 파리 전체와 같아질 수 없다. 어떤 시를 어떻게 번역한다 해도 원시(原詩)의 내적 의미를 모두 표현할 수는 없다.
본질을 알려면 본질을 파괴하라.
이 모든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단지 우리의 관점이나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호들에 의존한다. 상대적으로 알 수 있는 "다른 표현" 혹은 모사(模寫物)과는 달리 단지 그 속에 들어감으로써 알 수 있는 근원성이 있다. 어떤 한 대상 “주위를 맴도는” 것과 "그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 엄밀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대상 주위를 맴돈다는 것은 베르그송이 분석 (analyse)이라 부르는 지성의 특별한 활동을 의미한다. 대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베르그송이 직관(intuition)이라는 용어에서 의미하고 있는 바이다. 직관에 의해 베르그송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대상의 내부에 파고 들어가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것, 즉 표현할 수 없는 것과 합일하는 지적 공감(知的共感)이다. 과학과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차이가 바로 분석과 직관의 차이에 있다. 베르그송의 주장에 의하면 결국 과학적 추론이 분석에 기초하는 한, 그것은 분석하고자 하는 모든 대상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왜냐하면 “분석은 대상을 기지(旣知)의 요소로 환원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대상과 다른 대상에 공통적인 요소 에로 환원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석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그것과는 다른 것의 함수로써 나타내는 것이다.” 장미를 분석한다는 것은 그것을 따로 취하여 그것의 구성 성분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러한 분석으로부터 장미에 대한 지식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의 상태에서는 장미는 이미 정원에 있는 실물과 같은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의학은 인체를 여러 부분으로 해부하여 인체 해부학에 대한 많은 지식을 발견한다. 베르그송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분석적인 지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상의 본질을 파괴함으로써 배운다. 그것의 본질은 역동적이고, 생 동적이며, 연속적인 존재, 즉 지속(durée)이다. 그러나 분석은 이러한 본질적인 지속을 방해하며, 삶과 운동을 정지시킨다. 또한 참된 삶 안에서 통합되고 유기적이며 역동적인 실재인 것을 여러 개의 독립적이고 정태적인 부분으로 분리시킨다. 필자의 소견은 이렇다. 베르구송의 핵심 철학이 바로 여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본질을 파괴하는 담대함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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