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의 금속공예품의 역사, 특징, 사례 등을 파해쳐보자.
한반도 범종(梵M)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랜 종은 서기 725년에 이룩된 강원도 상원시 上院寺) 동종()이고, 가장 큰 종은 높이 3. 64m의 성덕대왕 신종(聖德大王神銃)이다. 한국에서는 신라시대 이래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범종을 상당히 많이 제작하여 한국 안에 현존하는 수도 적지 않고 합법적 비합법적으로 일본으로 간 예도 수십 구(口)에 달하며, 그중에는 일본에서 국보(國寶)로 지정된 것만도 20여구가 된다. 이러한 동종 제작의 성황은 불론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고, 실제의 제작 수는 현존레의 수십 배가 되리라는 추측은 근래에 지하에서의 출토례가 증가되고 기록을 참고한 결과에서 오는 것이다. 예컨대, 신라 경덕왕(景德王)13년 (754)에 제작된 높이 1장(丈) 3치(寸), 두께 9치, 사용한 구리 부게 49 만 7천 5백 81 근(斤)의 황동사(보) 종은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한국종(韓國鎭)이라는 학명과 시대에 따른 그 변화.
한국에서 제작된 신라 이래의 종은 중국이나 일본의 종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을 갖추고 있다. 순서상 한국종의 양식적 특징을 먼저 보기로 한다. ① 용뉴(龍紐)는 용 한 마리이고, 허리를 구부려 고리 같이 되어서, 이 고리를 통해서 종을 달게 되었다. ② 용 옆에는 음향 조절을 위한 원통형(圓筒形)의 음관(音管)이 붙어 있어 종의 내부와 관통되었다. ② 종 상하 끝, 즉 종견(鐘肩)과 종구(鐘口)에는 문양대 (紋樣帶)가 돌아가 있다. ④ 종견(鐘肩) 문양대에 붙여서 대칭되는 네 곳에 역시 문양대를 돌린 방형(方形) 유곽(乳廊)이 있다. ⑤ 한 유곽 안에는 9개씩 합계 36 개의 유(乳)가 있다. ⑥ 따라서 종신(鐘身)에는 넓은 공간이 생긴다. ⑦ 이 공간에 대칭되게 비천(飛天)과 당좌(座)가 설치되고 때로는 명문(銘文)이 조각되는 수도 있다. 이 형식은 신라시대, 고려 시대에 걸쳐 제작된 동종의 형식이다. 그러나, 고려시대가 되면 이 형식에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 ① 종견(鐘肩) 위에 입화(立花) 장식이 붙고, ② 때로는 음관(音管) 위에 구슬이 붙는 수가 있으며, ③ 대체로 종구(鐘口)가 넓어진다. 다시 조선 시대가 되면 종의 형태는 신라종과 고려 종을 혼합한 것과 같은 형태가 되고 표면의 문양 배치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다. ① 종견에는 복련 문(蓮文)이 조각된다. ② 유곽은 종견에서 완전히 떨어져 독립된다.③ 종구의 문양대는 총구에서 간격을 두고 위로 올라간다. ④ 종신 중간에 횡대(橫帶)를 돌려서 상하 2구(區)로 나눈다.⑥ 종신에는 비천 대신 보살상(薩像)이 양각(陽刻)된다.⑥ 종신의 상구(上區)에는 유곽(乳廊), 보살상 들을 조각하고 하구(下區)에는 장문(長文)의 명문(銘文)이 조각된다. ① 정상(頂上)의 음관(音管)이 없어진다. 한국종이라는 학명이 생겨 날 만큼 우리나라의 종은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봤을 때 매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문양의 주제(主題)가 달라지고 범자(梵字)가 양각되어 표면에 장식성이 농후.
앞으로 각 시대의 대표적 작품 몇을 보기로 한다. A. 상원사 동종(上院寺銅鍾)(삽도 39) 이 종은 한국에 현존하는 종 중에서 가장 오래고 가장 아름다운 종이다. 신라 성덕왕(聖德王) 24년 (725)에 제작되었고 높이 1. 67 m이다. 한국종으로서의 형식을 구비하였고 각 부분의 조각은 정교하여 놀라운 기술을 발휘하였다. 특히 종견(鐘肩), 유곽(乳廊), 종구(鐘口)의 조각은 다른 어느 종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문양이다. 용뉴(龍紐) 좌우에는 명문이 음각되어 이 종의 제작 연유를 분명히 밝힐 수 있다. 이 종이 처음 어느 절에 소속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조 초기에는 경북 안동(安東) 문루(門樓)에 걸려 있다가 예종(睿宗) 1 년 (1469)에 상원사(上院寺)로 옮겨서 지금까지 그 절에 소속되어 있다. B. 성덕대왕 신종(聖德大王神鍾) 이 종은 높이 3. 64 m, 종구(鐘口) 지름 2. 26 m, 총구 둘레 98 m이고, 명문에 의하면 구리 12만 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종견, 유곽, 종구의 문양대 (紋樣)에는 연주문(時文) 사이에 당초문(唐草文)을 조각하고 유(孔)는 연꽃으로 표현하였으며, 종구는 판릉형(八形)이 되어 각 능() 마다 연꽃을 배치 하였다. 정상 (JAL)의 용뉴(紐)는 장대(大)하며 음관(音管) 주위도 조각으로 차 있다. 종신의 넓은 공간에는 전후에 당좌(座)와 좌우에 1천 자가 넘는 명문을 새기고 비천(飛天)4 구(區)가 양각(陽刻)되었다. 이 종은 유곽(孔廊) 밑에서 아래위를 이어서 만들었고, 명문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景德王)이부왕(父王)인 성덕왕(聖德王)을 위히여 종을 만들려다 완성하지 못하자, 다음의 혜공왕(恭王)이 그 뜻을 이어 동왕(同王)7년 (771)에 완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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