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예술의 발달상 고찰
한국 공예술의 발달상을 예시와 함께 고찰해보도록 하자.
신라인들의 뛰어난 공예기술.
이들 장엄구의 본체(本體)인 사리병(名利)은 수정(水品)으로 만들고 밑에 역시 수경 원반(圓)을 깔았다. 뚜껑은 고분에서 출토되는 귀걸이 등의 세공법과 같은 수법으로 보상화문을 강식한 반구형(球形) 금제품이다. 이상의 사리장엄구는 물론 식탑 건립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인 만큼 당시의 공예 기술의 발달상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검은 물론이지만, 조각상들에 나타나는 양식에서는 외국과의 문화적인 연관을 볼 수 있어 또한 주목되고 있다. 즉 사천 완상(四天王俊)의 자세, 갑옷 등은 중국 석굴에 조각된 사천왕상과 매우 유사하며, 판부 중상(八部衆) 머리의 관식(冠飾) 마우에 있는 새 날개 같은 장식은 페르샤에서 시각 된 것이라고 하며, 보개(寶蓋)에 조각된 비천(飛天)의 경주 구황동 3층 석탑 사 리장 업고 73 양식 또한 서역(西域) 지방의 석굴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등 당시에 이미 당(唐) 또는 서역의 문화가 신라에 농후하게 전달되어 신라인들은 이들 분화를 충분히 구사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사리장엄구가 갖는 불상양식 고증의 의의.
경주 남산 동록(海山東範) 약간 언덕진 곳에 3층 석탑 1기 가서 있고, 그 밑으로 사지(寺址)가 있다. 십이지상(十二支援)이 조각된 돌들이 드문드문 박혀 있어 그 구조가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이 3층 석탑은 1942년 해체 수리되었고, 그때 제2층 탑신(路身) 중앙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장엄구는 금동 함 속에 있었는데, 합 뚜껑 이면에 장문(長文)의 명문(文)이 있어 또한 주목되었다. 명문에 의하면 친수(天授) 3닌(昭王 1년, 6192)에 신문왕(神文E)이 돌아감에 신목대 후(神e后)와 효조 대왕(孝照大王)이 가람과 3층 석탑을 건립하였고, 신목대 후와 효조 대왕이 돌아감에 신용(神龍) 2년(聖德王 5년, 706) 금 주대 왕(今主大王;聖德王)이 「불사리(佛舍利) 4, 전금 미타상 6촌 1구(全金彌陀像六一處), 무구정광 대다라니경 1권(無垢淨光大陀羅尼經一卷)」을 석탑 제2층에 안치하였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건탑의 사유와 연대, 사리의 내용과 안치 장소 등이 밝혀졌다. 사리 외함(函) 측면에는 99 기의 탑을 찍어서 99 기의 소탑(小塔)을 실지로 만들어 넣는 데 대신하고 있다. 이 탑에서 이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내용은 유리제 사리병(舍利甁) 1, 금제 사리합(舍利盒) 1, 금은합(金銀盒) 각 1, 금제 여래상(如來像) 2, 금제 고배(高杯) 2, 무구정광 대다라니 경 1, 옥천(玉) 1, 옥류(玉類) 다수, 금사(金絲), 죽봉(竹格), 경축(經軸) 등이다. 사리병에는 사리 4개를 넣어 사리합 속에 안치하였고, 금제 은제의 고배는 전형적인 고배 형태인데, 고분에서도 금제 은제 고배가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왕실에서 실지로 사용하였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일련의 사리장엄구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금제 불상 2구이다. 불상은 마땅히 조각으로서 다루어야 하겠지만 사리장엄구로서 탑 속에 넣었던 것이므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2구의 불상은 하나는 입상(立)이고 하나는 좌상(坐)이다. 명문에는 1구만을 넣었다고 있고, 그 불상이 좌상인지 입상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불상 자체가 가지는 양식에는 두 불상의 연대적인 차이는 없다. 두 불상 모두 미소를 띠었고 특히 광배(光背)의 형식은 고조(古)를 띠었을 뿐 아니라 투각(透刻) 수법은 매우 정교하다. 이 두 불상에 나타나는 양식 중 가장 주목되는 점은 삼국시대 양식에서 통일신라시대 양식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양식이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은 얼굴의 미소, 옷 주름의 처리 형식 등에서도 볼 수 있으나 좌상에서 의복 자락이 대좌(座) 밑으로 반만 내려와 있다는 점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사리장엄 구 안치(安置) 연대가 명확한 점에서 그 시기의 불상 양식을 고증하는 데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국사 3층석탑(佛國寺三層石塔) 사리장엄구.
불국사 대웅전 앞에는 동에 다보탑(多寶) 서에 서가 탑이 있다. 다보탑은 신라인의 창의가 발휘된 전무후무한 걸작으로 유명하며 석가탄은 한국 석탑의 진형(火型)을 보여 주는 표지적인 석탑으로서 또한 유명하다. 이 3층 석탑은 1966년 탑신부(身部)가 해제되어 제2층 탑신 중앙에 방형의 사리공(舍利孔)을 파고 그 안에 장치되었다.